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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다시 천천히 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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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다시 천천히 흐르다  

판화를 회화로 끌어올린 ‘판화가 박구환(46)  


2009년 01월 22일 (목) 20:28:13 범현이baram@siminsori.com  



     

▲ 판화가 박구환. 

며칠 전 융성하게 내린 비의 용량도 작업실을 비켜갔다. 이미 오래전이었을 눈이 아직도 작업실 마당에는 그득 얼음으로 흔적을 남기고 주인을 닮은 하얀 강아지 한 마리 눈 위에서 꼬리를 흔든다. 마당 한쪽 손수건만한 햇살이 비추는 곳만 엷게 살얼음으로 녹아간다. 


들어서는 작업실 천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종이컵이 반듯이, 혹은 뒤집어져서 일렬로 목을 매달고 비어있는 종이컵 공간의 분량만큼 새로운 역동을 준비하고 있다.


작가의 그림은 그동안 여러 곳에서 만났다. 그것은 왕성한 작업을 의미한다. 아니나 다를까. 찾아간 그의 작업실에서는 방대한 분량의 작품들이 천장 닿게 늘어진 줄을 따라 빨래꽂이에 짚여 깃발처럼 펄럭이며 제 몸을 더 풍부하게 말리고 있었다.


작가는 2002년도부터 작업했던 5~6년 전의 환경에 대한 작업 중 일부분이라고 천장을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판화만을 생각했던 작가에게 얼핏 미안한 마음이 든다. 재료가 다를 뿐, 작업은 같은 연장선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가끔씩 눈에 보이는 것만을 말하고 믿는 어리석음이 거듭 미안하다.


     



내면의 울림을 그리다 - ‘소리의 바다’ (Sea of Sound)


그가 지금까지 천착해 오던 작업의 주조는 ‘소리의 바다’다. 바다가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가진 어떤 생명체가 내는 소리가 있기에 바다가 있다. 


‘소리’들이 모여 ‘바다’처럼 거대한 생명력을 갖는다는 의미다. 작가는 바다 안에서 인간의 삶과 동질성 짙은 어떤 것을 발견함으로서 원형 이전의 바다, 인간의 삶에 소리를 담아내는 생명을 찾아낸 것이다.


그가 작업하는 한 장의 판화 안에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담겨 있다. 세상의 원형들이 생명을 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침이 다가오는 소리도 그에게는 빛 이전의 것이다. 새벽의 물안개 짙은 호수의 일렁임도 소리다. 


삶의 마음도, 눈빛도 그에게는 소리로 다가 온다. 그에게 있어 소리는 단순한 ‘들림’이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고 영혼을 울리는 삶의 파장이다.


실제 그의 그림 안에는 사람살이에 대한 소리가 가득하다. 밭가는 소리, 과일이 떨어지는 소리, 꽃이 피고 지는 소리, 걷는 소리, 강아지가 짓는 소리, 햇빛이 늘어가는 소리, 눈이 내리는 소리, 가을걷이 끝난 들판에 불 피워지는 소리, 과일들이 익어가는 소리 등등...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소리의 바다’ 시리즈다. 10여 년 넘도록 삶의 울림을 느끼고 경험하게 한 증폭에 주력한다. 아직도 소리의 바다에서 손을 접을 수 없다. 살아 움직이는 영혼의 울림에 기인한 그는 아직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사람들은 10년 넘도록 같은 주제로 작업하는 것을 진부하다 할지 모르지만 아직도 내가 표현하고 싶은 삶의 건강한 소리는 지겹도록 많다. 건강한 삶의 소리야말로 진정성의 회복이며 내가 표현하고 싶은 ‘소리의 바다’다”고 작가는 말한다.


     



아름다운 세상으로 징검다리를 건너다


그가 작업하는 것은 목판화다. 기본 원리는 매우 단순하다. 도장에 익숙한 우리는 초등학교 때 목판화 제작으로 매우 쉽게 만난다. 나무에 그어진 줄, 혹은 밑그림을 두고 나머지를 파서 음각과 양각을 표현하고 양각으로 조각된 면에 물감을 발라 찍어내면 일종의 작은 의미의 판화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판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판화는 다색(多色) 판화다. 느리고 섬세하고 더딘 작업공정을 거쳐야 비로소 현대의 다색판화로 태어나는 것이다. 기계적인 형상에 작가의 의도대로 만들어지고 계획된 섬세함에 우연성과 필연성까지 더해지고 가미되어야 심미안 가득한 현대 이미지로 제 모습을 찾는 것이다. 


게다가 ‘찍는 그림’인 판화는 과정은 복잡하고 땀의 대가를 요구하지만  ‘그리는 그림’과는 다른 감각을 나타낼 뿐 아니라, 우연성까지 가미되어 더 수준 높은 작품으로 완성할 수 있는 개연성을 얼마든 지 갖고 있어 매력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90년대 초, 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에서 만난 판화가 ‘가와치 세이코’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대학에서 회화만을 생각했던 작가는 현장에서 온몸으로 만지고, 느끼며 몸짓으로 작업하는 일본 작가를 보고 작업과 노동의 가치를 새로 인식하게 되었다. 


작가는 “종합예술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었고 결국은 지금까지의 작업에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며 “말이 안 통해 작업실 구경을 하다 쫓김을 당하기가 다반사였지만 그가 하는 작업을 보지 않으면 판화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말을 잇는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지만 시간을 비워가며 찾아다닌 일본의 판화 전시회와 워크숍 등은 지금의 그를 있게 하는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귀국 후 첫 작품은 일본에서의 땀과 노력의 결실이었다. “실험적인 작품이 주조였다. 나를 시험하는 단계이기도 했지만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는 몸부림이도 했다. 과정은 힘들고 결과가 더디기는 하지만 이미 판화가 갖는 나름의 커다란 매력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계속 쌓고 쌓다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이 모든 노력들이 작가를 순식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귀국 후 작가는 몇 년 안에 한국판화공모전 특선을 비롯해, 무등미술대전 대상, 광주시립미술관 대상, 백제 미술대상전 금상을 휩쓸다시피 받으며 판화 장르에 한 축을 이르는 획을 긋는다. 2009년에도 이미 대만에서 프로포즈를 받은 상태다. 


     




다시 느리게 움직이며 꿈꾸다 - ‘느리게 천천히’(Slow City)


작가는 다시 걷는다. 천천히, 느리게, 지금까지 해 오던 가라앉은 풍경에서의 소리를 안고 다시 슬로우 시티로 향한다. 앞으로 그가 하고 싶은 작업의 화두다. 더딘 판화 작업이 더 더뎌지지만 망설임 없이 걷는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지금까지 온전하게 자신의 몫으로 걸어왔으니 더 이상 헤맬 필요도 없다.


새벽 5시. 안개 낀 호수 위로 물안개가 열리며 삶의 모습이 열어지는 것처럼 작가는 다시 세상을 향해 자신의 삶을 열 준비를 한다. 


“삶의 가치는 돈이 아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최대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열정을 다해 하는 것, 이것 아니면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가치다”고 작가는 말한다.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꿈꾸며 유유자적(悠悠自適), 한가로운 일상을 향해, 평화를 향해 작가는 다시 꿈을 꾼다. 판화 작업을 할 수 있어 즐겁고, 자연스러운 시각적인 즐거움과 편안함을 타인들에게 줄 수 있어 작가는 더없이 행복하다.


     



프롤로그


열쇠의 구멍은 언제나 밖에 있다. 더 이상 달아날 수가 없다. 몇 개의 길들이 문을 두드린다. 모든 길들이 걸어 들어간 ‘소리의 바다’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발을 씻는다. 가슴을 열면 눈물이 얼어 있다. 풀잎 끝에서 온몸이 아프다. 길 잃은 내게 지나 온 모든 길을 잊어야 새 길을 볼 수 있다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바람이 되는 길이다.


아직 나에게도 길이 남아 있을까. 나의 길은 아직도 나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잘못 든 길에서 새 지도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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