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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출렁이는 휴식을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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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출렁이는 휴식을 즐겨라  

입력시간 : 2006. 03.21. 00:00 



화면에 출렁이는 휴식을 즐겨라


<2006광주비엔날레 특별기획-백은하의 미술읽기>


판화가 박구환의 작품세계


미술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속에 들어앉아 있는 신성한 물건이 아니다. 한국화, 서양화, 조각 등에서부터 퍼포먼스, 영상, 사진, 텔레비전, 비디오 등 대중매체에 이르기까지 우리생활 깊숙히 연관된 미술은 뚜렷한 정의와 한계를 지을 수 없다.


그러나 이처럼 생활 속에서 미술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미술은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일반인들은 쉽게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

올해는 광주비엔날레가 열리는 해다. 지역을 통한 지구촌 미술과의 소통을 목표로 하는 광주비엔날레를 바로 보기 위해 남도미술을 자세히 들여다볼 기회가 필요하다. 이에 소설가 백은하씨가 전하는 미술과의 말트기 ‘백은하의 미술읽기’를 준비했다. 백씨는 박구환, 조은경, 손봉채씨 등 광주·전남지역 현대미술가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미술읽기’를 통해 잘 구성된 특급 여행 코스처럼 색다른 정보와 맛깔스런 글쓰기로 미술의 세계로 안내한다. <편집자주>


박구환의 화면에서는 슈만의 ‘트로이멜라이’가 흘러나온다. 적요한 바닷가의 오후 4시, 야청빛 바다에서는 꿈결같은 멜로디가 물결친다. 몇 년 전 방한했던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가 가장 보고 싶어한 것은 강진, 진도 등 남도의 가을빛이었다. 남도의 가을빛에는 시원의 시작, 소리의 침묵이 숨어있다. Sea of sound, 소리의 바다, 판화가 박구환이 십여년 가까이 천착하고 있는 화면의 주제다. Sea of sound 혹은 Sound of sea.


광주 동림동에 메종 드 박구환, 박구환의 작업실이 있다. 하얗고 아름다운 2층의 목조 건물이다. 들창이 있고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철문을 열면 작품들이 걸려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오고, 2층에서는 강의도 하고 손님 접대도 한다. 그리고 1층에 또 다른 문(門)이 있다. 그곳이 그가 판화 작업을 하는 그의 지상의 작은 방이다. 책을 읽고, 드로잉을 하고, 판화를 찍는다. 그는 베니어판을 이용한 ‘소멸기법’을 이용해서 판화를 찍는다. 작품을 찍고 나면 그 베니어판은 사라진다. 소멸. 


그의 화면에는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것 같은 나무, 바다, 마을, 김매는 여인 등이 등장한다.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익숙하고 다정한 풍경이다. 현대 미술이 원하는 새로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2004년 현대 미술의 메카인 뉴욕 첼시에 있는 ‘Gallery 32’에서 전시회를 열어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국제 무대에 데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전혀 새로워 보이지 않는 남도의 풍경이 현대 미술의 본고장인 뉴욕에서 새로움을 획득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우리 인류가 가진 보편적인 정서, 자연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남도의 바람과 야청빛 바다로 표현되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이 주는 매혹, 철학자 탈레스가 우주의 원리로 지목한 것은 ‘물’ 이었다. 물의 시학, 물 속에 생명의 근원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박구환의 색채가 획득한 파스텔톤의 부드러움은 우리를 긴장시키거나 깨어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저 화면의 출렁임과 아름다움을 즐기면 그만이다. 휴식, 그의 작품은 관객을 쉬게 해 준다. 휴식같은 친구가 지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박구환은 자신의 예술 세계의 첫 마디를 짐자전거로 시작했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그는 짐자전거에 사과 상자를 싣고, 사과 상자를 배달하기 위해 언덕을 오르고 있다. 그가 부자가 된다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사과를 박스째 사 놓고 먹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첫 번째 마술인 미술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그가 중 3때였다. 그는 그 미술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J교수님의 화실을 방문하게 된다. 그는 그 곳에서 아름다운 유화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색깔의 향연. 화실에 배어있는 유화 물감 냄새와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 정밀한 붓질, 교수님의 완곡함 등. 그는 그림을 그리리라 작정한다. 그리고 정교한 구조를 가진 성장소설이 시작된다. 짐자전거와 사과 상자와 화실, 그리고 그는 정말 교수님의 붓을 빨고 화실 청소를 하면서 교수님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변태를 거쳐야 한다. 한 소년이 화가로 성장하는 것도 그 정도의 각성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는 84년에 조선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을 했고, 표현주의 화풍의 유화 작업을 했다. 그리고 91년 광주 금호문화회관에서 표현주의 화풍의 유화 작품들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나팔 소리’라는 작품은 무려 200호가 넘는 대작이다. 그리고 93년 광주 현산갤러리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에서 현재의 화풍의 목판화들을 선보인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를 했고 ‘소멸기법’을 익혔다. 


나는 그 2년 사이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표현주의 화풍의 유화에서 파스텔톤의 목판화로의 급격한 전환, 작가가 갈등을 겪었는지 아니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베니어판이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시나위의 정현철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서태지가 되면서 긴 머리카락을 자른 것이 떠오른다. 락그룹의 베이시스트가 댄스 뮤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운명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전환을 숨겨 놓고 있다. 그 후 그는 성실함과 열정으로 목판화 작업을 계속했고 ‘Sea of sound’를 뉴욕 화단에 선보였다. ‘Sea of sound’는 절정을 향해서 가고 있다. 


한 작가의 작품은 화가의 몸이다. 그리고 심상(心想)의 풍경이다.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도’라는 싯귀로 박구환의 ‘Sea of sound’를 설명하고 싶다. 

“나 이제 일어나 가리/이니스프리로 가리/거기 외 엮어 진흙 바른 오막집 짓고/ 아홉이랑 콩을 심고/ 꿀벌통 하나 두고/ 벌들 잉잉대는 숲속에 홀로 살으리/ 또 거기서 얼마쯤의 평화를 누리리/ 평화는 천천히/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리 우는 곳으로 떨어져내리는 것/ 한밤은 희미하게 빛나고/ 대낮은 자줏빛으로 타오르며/ 저녁엔 홍방울새 날개 소리 가득한 곳.”


우리의 심상 깊은 곳에 품고 사는 호수, 이니스프리. 그곳은 토요일 오후의 바다빛 일수도 있고, 연두의 싱그러움 일수도 있다. 그의 화면은 점점 풍요로워질 것이고 색깔들은 더 자유로와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언젠가는 나를 포함한 관객들에게 휴식같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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